용인송담대학교 건축소방설비과

home

교수게시판

마틴 루터 킹 : 인권 운동의 희망

작성자 서병택 작성일 2021-05-10
조회수 32회 댓글 0

본문

정지아 지음
마틴 루터 킹
 : 인권 운동의 희망
이룸
초판1쇄 발행일 2005. 5. 6. 초판4쇄 발행일 2008. 7. 9.


“저기 내 친구 존의 아버지가 계세요. 존의 아버지도 빵을 구하지 못했나 봐요. 내가 먹을 빵을 존에게 주려구요. 괜찮지요, 엄마?”

‘아무도 울지 않는 세상을 만들거야!’

“지금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어져 있단다. 백인들은 우리 흑인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아. 우리가 이런 세상을 바꾸어야 한단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이 선언되었지만, 흑인들은 여전히 백인들과 똑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까만 피부로 태어난 이유만으로 흑인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백인들에게 매일같이 모욕을 당해야 하는 흑인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언제나 자기 자신을 존중하도록 가르쳤다. 마틴이 피부색이 검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당당한 흑인으로 자란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사랑하며 싸워라. 백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우리 흑인을 미워하면서 사실은 그들도 괴로울 게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사상은 그런 마틴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사악한 제도에 협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 멕시코 내의 노예지구 확장을 위한 전쟁에 자금을 보탤 수는 없으므로 가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세금을 낼 수 없다는 대담함을 갖춘 소신과 같은 소로의 비폭력 저항주의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마틴은) 유물론과 공산주의에 신의 존재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세계가 정신이 아닌 물질로 시작되었다’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정당하다’는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또한 공산주의는 평등을 위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사상이었다.

‘자본주의는 아직도 빈부 격차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사람들은 인생의 성공 여부를 얼마나 큰 돈을 벌었나에 두지. 보람 있는 삶, 봉사나 나눔과 같은 삶의 중요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

간디 사상의 핵심은 ‘사랑의 힘(사티아그라하:satyagraha)’이었다. (…) 간디는 사랑의 힘을 통해 비폭력 저항을 이끌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 ‘그래, 진정한 평화주의는 악에 대한 무저항이 아니라 악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이야. 가슴에 사랑을 품고 악에 대항하는 일,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야’



‘투쟁의 바탕에 항상 사랑이 깔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연설을 하자.’
(…) ‘흑인의 권리를 되찾고 흑백 평등이 이루어질 때까지 버스 안 타기 운동을 계속하자’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 그날은 ‘몽고메리의 날’이었다.

“파크스 부인 사건(버스 안 타기 운동)은 이제까지 참아 왔던 흑인들에게 더 이상 참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했습니다. 불공평하고 모욕적인 흑인 대우가 개선될 때까지 우리의 항의 운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승차한 순서대로 앉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폭력과 위험으로도 항의 운동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백인들의 대량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다. 킹 목사는 자진해서 교도소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누구도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를 위해 투쟁한 증거가 되었으므로 자랑스러워했다.

항의 운동을 방해하려는 백인들의 여러 가지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은 흑인들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감옥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인들의 테러가 이어졌지만, 흑인들은 킹 목사의 인도에 따라 비폭력으로 일관했다.

‘몽고메리 운동’으로 흑인들은 자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열등감에 빠져 있던 흑인들이 자신들도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인도인들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킹 목사는 가난조차도 꺾지 못하는 인도인들의 훌륭한 도덕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폭력은 새로운 폭력을 낳고,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는다. 나는 앞으로 원한도 증오도 폭력도 없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세상이다.’



중심 상점가에 대한 불매 운동은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부활절이 코앞인 데도 중심 상점가를 드나드는 흑인들이 거의 없었다. 상점 주인들은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까지 버밍행의 흑인들이 이렇듯 일치 단결해 본 적이 없었다.

‘젊은이들을 설득해야 해. 자유와 정의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이로운지 알리는 거야. 그리고 그들의 힘을 모아 보자. 젊은이들은 순수하니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이 더 정확해. 그리고 옳다고 생각하면 헌신적으로 나설 거야.’



열띤 토론 끝에 워싱턴 행진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를 향한 흑인들의 열망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그 열기는 어떤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노예들의 후손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킹 목사의 연설은 백인들이 흑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흑인이 저렇게 감동적인 말을 할 수 있다니…….”
백인 우월주의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의 충격은 컸다. ‘흑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워싱턴 행진은 흑인들이 무례하고 무식하며, 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행동만 한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흑인 차별 철폐에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을 정의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죽음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문장을 끝내는 마침표가 아니라, 보다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찍는 쉼표입니다.
죽음은 인류를 무의 상태로 이끄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간을 영생으로 이끄는 활짝 열린 문입니다. 이런 담대한 믿음과 불굴의 정신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버텨 나가시길 바랍니다.”

뜻밖에 반가운 소식에 일행은 서로 부둥켜 안았다. 수많은 흑인들이 길거리에서 주장했던 외침들이 마침내 법으로 제정된 것이다.

상원 의회와 하원 의회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제퍼슨의 고귀한 진리를 확증하는 기념비적인 법령에 비준을 했다. 그리고 린든 존슨 대통령도 〈시민권 법령〉에 서명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이틀 앞둔 1964년 7월 2일이었다. 그날 이후 흑인들도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진정한 미국 시민으로서 거듭난 것이다.

흑인도 백인과 동등한 미국 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하는 〈시민권 법령〉은 제2의 노예해방 선언이라 할 말했다. 이것은 시민권 투쟁으로 얻어낸 가장 중대한 성과였으며, 격렬한 산고를 견디고 태어난 법령이었다.

그 산고를 견디게 해 준 것은 수많은 시민들의 힘이었다.
버밍햄의 흑인 항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 아무 죄 없이 죽은 어린아이들, 감옥에서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내 무릎 꿇지 않았던 사람들, 워싱턴 시가지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 그리고 시민권을 옹호하다가 암살된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민권 법령〉은 이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며, 길거리로 뛰쳐나온 수많은 흑인들의 열망으로 얻어진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세 끼 식사를 평등하게 하고, 교육과 문화를 평등하게 누리고, 인간적 존엄과 자유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언젠가는 비폭력이 폭력적인 전쟁을 이길 것입니다.

평화와 인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이 상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노벨 평화상 상금은 비폭력 운동의 발전을 위해 쓰겠습니다.

앨라배마 주 셀마의 흑인들은 여전히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다. (…) 흑인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면 흑인들도 얼마든지 의회로, 행정부로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매질을 참고 견뎌야만 우리는 중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매질을 참고 견뎌야만 저들의 야만적인 행위가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매질을 참고 견뎌야만 우리는 앨마배마 주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땅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흑인 빈민가가 없어지고, 흑인과 백인이 함께 안전하고 깨끗한 주택에서 나란히 살게 되는 날까지 행진을 계속합시다.



폭력은 반동적인 백인들의 저항을 강화시키고, 자유주의적인 백인들의 죄책감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비폭력 투쟁만이 도덕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권리를 쟁취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시카고의 흑인들은 인간의 자존심이니 자유니 하는 그럴싸한 말보다 당장 먹고 살 문제가 더 급했던 것이다.

‘미국인의 영혼을 파괴하고 베트남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은 옳지 않다. 나는 이제 침묵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혼자서 가야 할 때도 있다. 나 외에는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면 혼자서라도 해야 한다.’

킹 목사의 관심은 가난의 문제로 옮겨 갔다. 북부의 흑인 문제에 부닥쳤을 때부터 그는 가난이 흑백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차별을 낳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열망이 가득한 삶은 훌륭합니다.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그날이 오면, 마틴 루터 킹 2세는 자신의 인생을 남을 돕는 데 바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1968년, 향년 39세) 그는 검은 마음의 백인에게 사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