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송담대학교 건축소방설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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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매천야록

작성자 서병택 작성일 2021-05-06
조회수 40회 댓글 0

본문

정동호 편저
이야기 매천야록
 : 한 권으로 읽는 역사이야기, 매천 황현(1835-1910)
효원출판
초판 인쇄 2007. 7. 20. 재판 발행 2008. 8. 25.

시국을 간파한 매천은 정사에 뜻을 두려하지 않았으나 양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 생원회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끝내 벼슬에 몸담기를 꺼려하고 귀향하여 두문불출 학문연구에만 골몰하였다.
때로는 중앙정계 고관직에 있는 지우들이 서신을 보내 상경하여 함께 국사를 돌볼 것을 간청한 바도 있었으나 그는 탁류에 휩쓸려 미친 사람의 행세를 하기 싫다고 거절하였다.

경복궁 재건이 시작되면서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었고, 대원군은 강제로 전국 8도 부호들에게 돈을 각출했다.

임금 종친으로서 과장에 들어온 사람은 가까운 친척이건 먼 친척이건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은전을 뿌렸다. 이때부터 시험장은 불법이 자행되었다.

고종과 민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되길 비는 제사를 8도 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 등이 기승을 부렸다.

갑오년(1894년), 초시(과거의 맨 처음 시험)를 돈으로 매매했다.

전국적으로 탐관오리들이 깔려있어 수탈이 끊임없었기 때문에 부적축재가 심하면 조사하여 죄를 주었다. (…) 하지만 거물급 탐관오리들이 모두 빠져나간 상태로 처벌이 흡족할 수가 없었다.

(광무9년) 전 참판 홍만식이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나 민영환은 나라를 위해 잘하지 못해서 국세와 민계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한번 죽음으로써 황은을 갚고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라.”

특진관 조병세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 조병세는 “내가 죽지 않으면 죽는 날에 어찌 민영환을 볼 것인가?”라면서 소매에서 아편을 꺼내 삼켰다.

“우리는 한국의 대신이다.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어찌해서 너희들이 참견하려고 하느냐? 더구나 죽은 뒤에까지 모욕을 주려고 하느냐?”

전 검사 이준이 헤이그평화회의에서 국변을 호소하고 스스로 칼로 찔러 자결했다.

환관 이병정이 이완용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대감은 세신(대대로 섬긴 공로가 있는 신하)으로 벼슬에 오른 지 30년에 의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요. 은혜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같은데 오늘의 이 거사는 대감의 성공이란 말인가?”라고 하자 역시 수금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으로 통역을 하는 자가 애매한 사람들은 무고하여 죽이고 약탈함이 외국침입자보다 더 심해 사람들은 그들을 “토왜”라고 하였다.

이종호, 윤치호, 안창호, 등이 평양에 대성중학교를 세웠다. (…) 우리나라의 중학이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다.

일본농부들은 매일 들 가운데 한 구역을 점령하면 문득 위험하여 사방의 물줄기 위를 막아서 물이 다른 데로 흐르지 않게 했다. 날이 가물면 다른 사람의 밭을 끊어 스스로 물을 대며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색이 있으면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찼다.

(융희3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살해했다. (…)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전파를 타고 동서양에 퍼지니 세계 각국은 모두 놀라며 “조선에는 아직도 사람이 있구나.”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의병토벌을 빙자하여 애매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학대했는데 이때 잡혀 죽은자를 모두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다.

(융희4년) 안중근의 모친이 변호사를 방문하러 평양에 도착했는데 그녀의 말과 안색이 의연하여 열장부(열사)와 같았으며 사람들은 그 어머님의 그 아들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