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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작성자 서병택 작성일 2021-04-02
조회수 64회 댓글 0

본문

이성우 지음
김좌진
 :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역사공간
1판1쇄 발행 2011. 12. 30.

김좌진은 (…) 홍성의 안동 김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김좌진 집안은 홍성의 명문가였다.

김좌진이 유년시절 병정놀이를 즐겨했던 이유는 서당에서 『통감』을 배우던 중 ‘글은 성명을 적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구절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기』에 나오는 항우의 고사로 ‘학식만 내세우지 말고, 지식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라’는 것이었다.
즉 그는 ‘책 속에 묻혀 있기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라’는 뜻을 깨달은 것이다. 이 고사는 항우가 지략이 없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도 10만의 유방에게 피하면서 무武 뿐만 아니라 문文의 중요성도 일깨운 고사이기도 하다.

홍주의병이 봉기했던 1906년은 김좌진이 17세 되는 해였다. 이때는 이미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준비하며,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는 홍주의별의 홍주성전투와 일본군이 의병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김좌진은 전 생애를 국권회복을 위해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김복한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김좌진은 가문의 전통인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노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지만, 노비는 존속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어느 날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의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계몽의식을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10대 가장의 결정으로는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좌진은 독립운동 중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백야 김좌진과 백범 김구, 두 민족지도자의 첫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이루어졌다. 훗날 김구는 광복 후 김좌진 추도회에 참석해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남을 회상하며 통곡했다.



김좌진은 만주 항일투쟁 동안 한결같이 대종교를 신봉했다. (…) 대종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며 만주항일투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대종교는 만주독립운동의 산실이었으며, 정신적 기반이었다.
대종교는 1910년 나철 등이 국조 단군을 교조로 세워 1909년 창립한 단군교를 개칭한 것이다.

김좌진은 만주 망명 이후에도 국내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그의 독립에 대한 방략은 군대를 양성해 일제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독립군을 이끌고 국내로 들어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김좌진은 사관생도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 양성에도 주력했다. (…) 병사모집은 국내와 러시아에서도 이루어졌다.

무기는 800정, 기관총 4정, 야포 2문, 수류탄 2천여 개를 보유했다. 간부 및 병사들을 합쳐 1,600여 명의 대한군정서군은 만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



대한군정서뿐만 아니라 남북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은 군사훈련과 무기 등을 구입해 전투력을 갖추어 나갔다. 무장한 독립운동단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일본군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독립군 탄압에 나섰지만, 미온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독립운동단체들은 중국 측 입장을 고려해 산림지대로 본거지 이동을 시작했다.
김좌진의 대한군정서도 본거지 이동을 해야 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직면한 김좌진은 대감자를 떠나 청산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한군정서의 간부들은 북만지역을 거쳐 노령지역으로 이동했고, 청산리 이동은 전투부대만 이루어졌다. 근거지 이동에 대해 총재 서일과 사령관 김좌진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서일은 (…) 북만지역의 오지로 이동해 우일을 도모하자는 입장이었다. (…) 그러나 김좌진은 독립전쟁을 결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은 독립군 기반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계획이었다. (…) 일본군은 북간도지역 독립군을 이중으로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북간도지역 독립군부대가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과 벌인 10여 차례의 전투를 총칭한 것이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군을 이끌고 백운평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에 대한 전과는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 전사자는 130여 명, 부상자는 220여 명이었다.

대한독립단은 만주와 연해주지역의 모든 독립군과 의용병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것이었다. 대한독립단 1여단은 이만, 2여단은 영안현에 본부를 두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김좌진은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신민부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가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두 단체의 중심인물은 대부분 대한군정서와 청산리대첩에 참여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좌진은 신민부에 참여하면서 정당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신민부가 정부조직체로는 출발했기 때문에 정당 중심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북만지역 한인들은 공산주의사상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 바탕에는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살아야 했던 재만 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김좌진의 자금모집과 독립군 양성은 뜻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좌진은 일제군경 뿐만 아니라 만주 군벌과 관리들의 탄압을 받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일제와 중국 측이 야합해 독립운동단체와 한인들을 무참히 탄압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김좌진은 강력한 무장투쟁만이 이런 참담함을 반복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정부와 군사부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중앙집행위원장이 된 김좌진은 군정활동 뿐만 아니라 신민부 창립의 목적이었던 북만지역 한인사회의 안정을 위한 활동도 펼쳐나갔다.

교육 사업은 한인자제들에게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북만에서 생활하는 동포들의 한결같은 바람이기도 했다.



만주지역 유일당唯一黨 운동은 1927년에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상해에서 유일당운동을 전개한 안창호가 1927년 초 길림에서 민족대단결을 역설한 것이 계기였다. 만주지역 유일당운동은 정의부가 주도했다.

김좌진뿐만 아니라 신민부 군정파는 자유시참변 이후 북만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계속해서 대립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응할 이념과 방략을 고민하던 김좌진에게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권력투쟁과 파벌로 인해 많은 실패를 경험했던 김좌진에게 개인의 자유의사와 자유합의를 존중하는 아나키즘은 민족주의를 대체할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나키즘은 통치기구의 폐지와 개인의 자유성 및 자유의지과 자유연합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철저한 조직규율과 중앙집권, 프롤레테리아의 독재를 강조한다.

김좌진은 재만무련(在滿무정부주의연맹)이 결성되자 이들과의 연합을 추진했다. 그는 재만무련이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동포들이 갖고 있는 신민부 군정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김좌진은 스스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재만무련 노선이 이탈된 동포들의 민심을 잡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여겼다.

김좌진은 1927년 7월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보류하고 재만무련의 무정부주의를 수용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아나키즘은 독립의 방법으로 민중의 직접혁명을 감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권력적 강제와 지배가 없는,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암살·파괴·폭동’에 의한 ‘폭력혁명론’을 제시했다.

동포들의 민심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포들은 생활개선과 영농방법 개선 등 한족총연합회가 추진하는 사업들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동포들의 마을에는 구성원 스스로가 힘을 모아 이끌어 나갈 자치조직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만주항일무장투쟁의 신화였던 김좌진이 순국한 것이다. 1930년 1월 24일(음력 1929. 12. 25) 오후 2시경, 김좌진은 자신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암살당했다. 범인은 정미소에서 일하던 공산주의자 박상실이었다.

문제는 박상실이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당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했던 양환준은 김좌진 암살범을 공도진으로 지목했다.

김좌진 암살은 화요파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하 만주총국)에 의해 자행되었다. 김좌진이 활동하고 있던 영안현은 북만지역에서도 공산주의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고, 만주총국과는 신민부 시절부터 갈등의 골이 깊었다.

김좌진 암살은 만주총국의 박상실이 자행했지만 그 배경에는 일제와 만주총국 간부였던 김봉환(일명 김일성)이 있었다. 김좌진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던 이강훈은  (…) ‘김좌진 암살의 하수인은 박상실이고 배후 지시자는 김봉환이며,
김봉환은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의 사의에 보답하기 위해 대죄를 범했다’고 했다. 이후 김봉환은 변절해 일제에 귀순했다.

1934년(음) 4월 김좌진의 유해는 종산인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되었다. (…) 1958년(음) 1월 오숙근 여사가 타계하자 아들인 김두한이 현재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0번지로 이장해 오숙근 여사와 합장했다.